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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8. 22. 21:49

볼래? 지금 이야기2011. 8. 22. 21:49

1. 눈
지난 7월 8일 망막 레이저 시술 후 두번째 검사를 받고 왔다.
치료는 잘 됐고 다시 심해지지 않는다면 괜찮을 거라는 진단이다.

어릴 적부터 고도근시에 비문증은 있었고,
부모님이 모두 망막박리수술에 백내장수술까지 받은 가족력이 있던지라
눈 문제에 아주 예민했다.

작년 초 처음 왼쪽 눈에 간헐적으로 빛이 지나는 섬광증이 생겼고
나아질 기세가 보이지 않아 동네 안과에 찾아갔다.
그리곤 유리체에 문제가 생긴 거라 진단받았다.

한동안 약을 먹고 나아졌던가, 그대로였나.
3개월을 잡고 받던 약물치료는 흐지부지 끝나버렸다.
그 후 조금 신경을 안 쓰고 살다가 업무상 모니터를 많이 보기 시작하며 급격히 눈상태가 안 좋아졌다.

가을 쯤엔 양쪽 눈에 수시로 빛이 번쩍거렸고
눈이 침침해지고 업무가 끝난 직후엔 시력검사를 해도 시력이 나오지 않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래서 해가 바뀌면서 일단 모든 일을 쉬기로 했다.

하루종일 쉬기만 하니 처음엔 회복되는 듯 했지만
빛이 휙휙 지나가는 증세는 계속 됐고
우연히 망막에 대한 글을 읽고 더럭 겁이 났다.

바로 서울대병원을 예약했다.
몇 주 후 받은 검사 결과는 사실 별 다를 게 없었다.
고도근시로 인해 망막이 많이 약해져있어 비문증과 섬광증이 나타나는 거고 현재로써는 해줄 수 있는 게 없단다.

그런 상태로 도서관에서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되었고
어느날 문득
오른쪽 눈이 불편해졌다.

처음엔 콘택트렌즈에 이물질이 들어갔거나 단백질이 낀 줄 알았다.
렌즈를 빼고 나서도 그러자
잠을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날,
사무실에서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 눈이 이상해,"

당장 갈 수 있는 안과를 찾기 위해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봤지만
모두 몇 주 후에나 예약이 가능한 상태였고
유일하게 김안과에서 2시 안에 오면 진료를 봐준다고 했다,

약해져있는 망막에 구멍이 났고
오른쪽 눈을 가리던 뿌연 물체는 그 구멍으로 인한 거였고
이대로 심해지면 망막박리까지 간다고 했다. 아직은 망막변성 및 열공 상태.

몇 주 후 망막을 '지지는' 레이저시술을 받았다.
회복시키는 치료가 아닌 더 나빠지는 걸 예방하는 치료.
비문증과 섬광증과 내 오른눈을 가린 이 뿌연 녀석은 평생 가지고 살아가란다.

1년도 훨씬 전부터 눈이 안 좋아질 걸 알고 병원을 찾았음에도
나빠질 때까지 기다리라는 진단 뿐이었고,
상태가 안 좋아진 후에도 결국은 더 안좋아지는 걸 막는 치료 뿐이라니, 왠지 좀 허무하다.

2. 듣기
눈 상태가 안 좋아진 6월 중순부터 레이저치료가 잘 되어서 눈이 괜찮다는 진단 받기까지
집에서 독서금지, 컴퓨터금지, 스마트폰 금지령을 받았다.
출근해서 일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 밖에 눈에 영향을 끼치는 일은 일절 못하게 한 거다.

업무시간에 종일 컴퓨터 모니터를 노려보는지라 집에서 피씨를 켤 일은 별로 없다.
근데 약간의 활자중독증세가 있는 나로서는 책도 못 보고 sns도 못 읽는 게 미치도록 괴로웠다.
대체 그 기나긴 시간을 뭘 하며 보내라는 거지?

잠이 늘긴 했다.
평소 01:30 to 06:30 의 5시간 수면을 고수했으나 할 게 없으니 12시만 되면 잠에 빠져들었다.
(덕분에 친구들과 놀러간 여름휴가에서 혼자만 일찍 잠들어 아직까지 놀림을 받는다, 흥)

음악도 듣고 팟캐스트로 라디오도 들었지만 뭔가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읽는 것에 대한 욕구였다.
엄마 몰래 책을 읽다 혼나기도 했다. (책 읽는다고 혼나는 애는 너밖에 없을 거라는 놀림도 받았다, 흥)

그러다 들은 게 김영하의 책읽는시간 팟캐스트.
읽는 걸 좋아하지 뭔가에 집중해 듣는 걸 별로 즐겨하지 않던 나로서는
김영하 작가님을 좋아하면서도 그간 들을 생각을 안했던 거였다.

그래서 오히려 다행이었다.
이 날을 위해 아껴둔 느낌.
하나하나 아껴가며 들었다.

김홍희씨의 방랑이 듣기에 가장 좋았고
커트 보네거트 나라 없는 사람도 좋았다.
김영하 작가님이 한마디 한마디 보태는 말들도 참 좋았다.

최근에 KBS 라디오의 책읽는밤이란 프로그램을 알게 되긴 했다.
내가 읽지 못하는 동안 책앓이를 할 때 누군가 말해주었더라면 정말 고마웠을텐데.
케본부는 이상한 얘기 그만 떠들고 이런 방송이나 더 알려주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엥...

오늘은, 검사 때문에 산동시킨 동공이 작아지는 동안 이동진의 꿈다방의 궁금한당신 코너 김중혁작가님 편을 들었다.
좋아하는 이동진평론가님에 사랑하는 김중혁작가님 조합이라니.
(너무 행복해서 중간에 살짝 잠들었던 건 비밀이다.)

이런 시간들을 겪으며,
들을 가치가 있지만 그냥 흘러가버리는 것들에 대해 고민한다.
작가의 낭독회가 그렇고 강연회가 그렇다.

'나는 런던에서 사람책을 읽는다'를 읽으며
리빙 라이브러리를 그냥 흘려보내는 게 아닌
도서관에 음성으로 보존하는 문제에 대해 고민한다.

점자책이 아닌
나처럼 일시적으로 읽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방법들도 자꾸 고민한다.

3. 살기
오늘도. 산동시켜서 눈에 빛이 쏟아져 들어와 반쯤은 보이지 않는 상태로
들을 것들에 대해 고민하다가 갑자기 눈물이 솟는다.
오전에 얼핏본 기사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디자인 서울' 때문에 사라지는 점자블럭.
난 처음에 서울시장을 흠집내려는 사람들이 하는 소린줄 알았다.
'진짜 기사'를 찾아보기 전엔.

사실 나 정도만 돼도
계단 끝이 다른 색으로 처리되지 않으면 굉장히 위험해진다.
원근만으로는 계단이 끝나는 지점을 절대 알아차릴 수 없거든.

우리 아빠는 몇차례에 걸친 수술에도 불구하고
결국 한쪽 눈을 실명했고,
덕분에 가뜩이나 좁은 시야가 더 좁아져 여기저기 잘 부딪히고 다녔다.

나도 점점 아빠처럼 자꾸 여기저기 부딪히며 다니는데
그래도 세상이 자꾸자꾸 좋아지면
잘 안 보이는 사람들에게 조금은 더 좋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는데.

아 이렇게 퇴보할 수도 있구나.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퇴보하는 사회인줄은 알았으나,
이런 면으로도 퇴보할 수 있다는 사실에 한숨이 난다.

기본적인 게 보장이 안 되는 사회에서
읽는 게, 읽을거리를 다른 방법으로 누리는 게
얼마나 의미를 가질까.

농담처럼
내 인생의 목표는 내 삶이 끝나는 날까지 시력을 잃지 않는 거라고 말하곤 하는데
정말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어처구니 없는 곳에서 생긴다.
:
Posted by libhyon